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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크랩] 우리나라 석유의역사

우리나라에 석유가 들어와 사용된지 1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19세기말에 유입된 석유는 1백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생활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한 국내석유산업은 시작부터 외국석유기업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1960년대 정유사들이 등장하면서 국내석유산업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후 한 시대는 보호와 규제속에서 그리고 이제는 치열한 시장경쟁의 원리 속에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이에 본지는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나라 석유산업의 1백년 역사를 돌아보고 이와 함께 석유 유통시장의 변화상을 사진으로 조명해 보았다.

구한말 ~ 해방전(1945년)

1880년대 매천야록 등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석유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0년대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876년 이후 일본인이 부산에 거주한 것을 볼 때 서울 이외의 곳에서 먼저 석유가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유통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기에는 석유등의 보급으로 석유사용이 일반화되었다. 구한말에는 주로 미국과 러시아에서 석유를 수입했는데 우리나라에 처음 진출한 석유회사는 미국 석유회사인 스탠다드 석유회사다. 특히 러시아 석유완제품의 경우 관세가 5%로 일반 수입제품보다 훨씬 낮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1910년대 한일합방 후 본격적인 외국계 석유회사가 등장했다. 이때 등장한 외국계 석유회사는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 텍사코 오일, 영국의 쉘사 등의 3개 석유회사이다. 이중 스탠다드 산하 버큐엄 오일은 조선중앙 미유, 남조선 미유, 북조선 미유 등 3개 대리점을 운영했으며, 한국 최초의 주유소인 역전주유소(서울역앞 소재)가 탄생하기도 했다.

1920년대 석유가 에너지로서 상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 차량, 선박, 공장 등에서 사용되었다.

1930년대 1935년 조선석유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원산에 최초의 정유공장을 세웠다. 또한 석유류에도 상표가 붙기 시작했다. 주요 상표명으로는 스탠다드의 용마표(휘발유)·승리표(등유)가 있었으며, 텍사코의 유일한 대리점인 제일사가 솔표라는 상품의 석유를 판매했다. 한편 영국의 쉘은 서울에 붉은 조개표란 상표로 종로주유소를 세웠다.

해방후 ~ 1970년대

1945년 해방후 미군정은 석유배급 대행회사인 PDA를 통해 군용제품을 일반인에게 판매했다.

1949년 대한석유정제주식회사인 KOSCO가 PDA를 흡수하여 석유류의 정제 및 판매업무 담당, 그러나 그해 10월 칼텍스, 스탠다드, 쉘 등 3사의 대리점을 통해서만 유통 및 판매가 이루어짐

1953년 6.25이후 스탠다드, 칼텍스, 쉘 등 3개사가 철수하고 대한석유 정제회사가 직접 판매를 전담함. 이때 KOSCO에 의해 군용유류가 조달되나 부족하자 엔에크, 폴 등 미군의 유류관할을 거쳐 석유수입이 급증했다.

1959년 정부는 경유사용을 유도하기 위해 휘발유 물품세를 60%에서 100%로 인상하게 되어 휘발유 소비량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1960년 극동석유가 출범 (윤활유 전문판매)했으며 상공부는 석유류 배정요강을 발표했다.

1962년 대한석유공사법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대한석유공사가 설립되었다. [유공(현 SK)의 모태]

1967년 칼텍스와 럭키그룹이 합작하여 호남정유가 탄생(현 LG정유) 했다.

1968년 휘발유 세금 100%에서 200%로 인상 (3월)

1969년 2월에 석유제품 가격고시제 실시를 했으며, 유니온 오일과 한국화약이 합작하여 경인에너지가 출범(11월)했다. 또한 이 시기에 석유제품 가격인상(3.76%)이 되었으며 유통가격(소비자가격)은 지역별 특성에 따라 상이하게 적용되었다.

1970년 석유사업법 공포

1972년 대리점 주유소가 난립하는 등 과당 경쟁상황이 벌어지자 정부는 석유사업법 시행규칙을 시행, 신규 대리점 및 주유소 허가를 잠정 중지시켰다. 또한 상공부 고시에 의거 최종 소비자 가격까지 정부가 고시.

1973년 원유가격이 31.4%나 인상되면서 국내석유제품 가격도 30% 인상되는 등 제1차 석유파동 (10월)이 발발했다. 1974년 국내 석유제품 가격이 82% 인상되었다.

1975년 석유판매업법이 개정되어 석유판매업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전환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석유 파동을 겪은 후 석유 배급조치를 내렸다.

1976년 한이석유 (현 쌍용정유)가 설립되었으며 부가가치세가 신설되었다.

1978년 한국석유개발공사법 공포

1979년 한국석유개발공사 발족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국내 석유제품 가격은 59%나 인상되었다.
 

1980년대

1980년 선경, 유공인수. 한이석유, 쌍용정유로 상호 변경을 했다.

1981년 정부는 정부, 정유사가 신규로 직접 주유소를 소유, 경영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주요 골 자로 하는 3.14 조정명령을 내렸다.

*대리점 및 주유소 등의 정수제 폐지했다.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 (4월)
* 대리점과 주유소간의 공급계약에 대한 시정명령 조치 (계약기간 단축 및 복수거래 허용 등)는 대리점과 주유소가 급격히 팽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주유소 및 대리점 업을 하기 위한 투기바람이 불기도 했다.
* 호남정유 청정휘발유 CX-3 휘발유 출시, 휘발유 품질 경쟁이 시작되었으며 호남정유는 기존 주유소의 폴교체 및 가격할인, 자금 지원제시 등으로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호남정유에 대응하기 위해 유공은 판촉물을 지원하는 등 뉴슈퍼 캠페인 활동을 했다. 특히 이때 옥탄가 경쟁으로 약 60여개의 자영주유소가 도산하기도 했다.

1982년 대한석유공사를 유공으로 상호 변경하였다.

1983년 3.14 조정명령 이후 대리점 및 주유소가 급격히 증가하여 주유소당 판매물량이 1983년과 1984년의 경우 1981년보다 오히려 감소했다. 그 결과 유통업계는 유통마진인상을 요구하고 또한 가짜 휘발유가 범람하기 시작한다. 또한 각 시도의 주유소 허가기준을 마련, 기존 주유소와 직선거리 1∼3Km이상 거리제한을 두고 주유소 허가제가 실시되면서 주유소수의 증가추이가 둔화되고 주유소 단위당 판매량이 증가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유가자유화에 대한 의견이 대두되었다.

1984년 주유소의 협소한 드리이브웨이의 활용도를 높이자는 취지에서 넌스페이스(천정식) 주유기가 도입됐다.

1985년 * 주유소내 자동세차기 보유현황 약 17대 (85년 2월기준)
* 주유소 POS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
* 유사 휘발유가 극성을 부리자 정부는 ‘휘발유 유사제품 신고자 포상’제도를 신설

1987년 * 주유소내 편의시설 및 현대화 지침이 내려졌다. (4월) * 정유 5사 무연휘발유 공급 개시 (7월)

1987년 국내대륙붕에서 최초로 가스 발견

1988년 * 주유소들은 정유사와의 직거래를 쟁점화하기 시작
* 정부 등유공급 확대 조정명령

1989년 * 쌍용정유가 일으킨 옥탄가 파문으로 자영주유소들이 도산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서울시의 주유소간 거리규제가 1Km에서 700m로 완화된 후 175건의 주유소신설 신청이 러쉬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작 신설 가능 주유소 수는 40여개 정도였다고.

1990년대

1990년 *주유소마다 판매원이나 탱크로리 기사 구인난을 겪기 시작. * 에너지소비 절약운동으로 주유소의 심야영업 (24시부터)이 제한되었다.

1991년 미국식 구멍가게라 불리는 주유소 병설 편의점인 ampm이 주유소에 도입되었다.

1992년 주유소 상표표시제 실시(4월) 이후 강남구에 무폴 주유소가 등장했다. 또한 셀프서비스와 자동판매주유기가 첫 등장했다.

1993년 * 6대 도시 주유소간 거리제한이 폐지(11월) 되었다. * 국내 최초로 동서울주유소에 셀프주유기가 선보인 후 반포주유소 등 전국적으로 약 50 여대의 셀프주유기가 등장했다.

1994년 * 유가 연동제를 통해 최고 판매가격제를 실시(2월) 했으며 석유산업 자유화계획이 확정(12 월) 되었다.
* 주유소마다 고정고객 확보를 위해 자체 카드제와 쿠폰제가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유학파 2세 주유소 경영자들이 등장, 주유소의 복합화 및 서비스 경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쌍용정 유 옥탄가 97로 (4.27 조치) 인해 정유사들의 휘발유 가격인하 경쟁이 심화되어 자영주유 소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995년 * 주유소간 거리제한 제도가 전면 폐지(11월) 되면서 신규주유소 건설 붐이 일어 주유소 수 가 급증가세를 기록한 한해였다. * 주유소 판촉물 안주기 운동이 벌어질 정도로 판촉경쟁이 치열했다.

1996년 5월 호남정유가 LG-Caltex 정유로 사명을 변경하고 10월에는 주유소 병설 편의점 LG-Star 개설, 본격적인 주유소 병설 편의점시대를 열었다. 한편 주유소시장은 전국적으로 자동세차기 보급으로 무료세차와 판촉서비스가 극성을 부렸다. 이 때문에 주유소 경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997년 * 석유제품가격 전면자유화 및 석유 수출입자유화가 실시되었고 석유판매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었다.
* 주유소간 가격경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국 주유소의 휴·폐업이 증가하는 등 주유 소 경영난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한편 정유사의 카드 마케팅이 점화되었으며 주유소 시장 점유율 1위의 유공이 SK로 사명을 변경하기도 했다.

1998년 한국석유공사 동해-1 가스전 발견

1998년 IMF이후에도 가격경쟁은 여전히 지속, 주유소마다 경비절감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셀프주유소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외개방에 따라 석유 완제품 수입업체가 등장하면서 저가 공세를 하자 무폴주유소가 증가하는 시기였다. 한편 이때 현대정유는 한화에너지를 인수했다.

1999년 * 현대정유의 한화에너지 흡수로 정유 4사 체제가 되었다. * 주유소시장은 여전히 가격경쟁이 지속되었으며 경기회복 분위기에 편승, 주유소의 경품 행사가 활기를 띠는 등 또다시 주유소시장에 판촉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유소시장 에는 지나친 가격인하로 인해 덤핑유, 유사휘발유가 나돌았다. 반면 일부 주유소들에서 세 차 유료화의 조짐이 일어 유외수익창출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점검하기도 했다. 한편 정유사의 보너스카드마케팅의 열기가 가득했다.

2000년대

2000년 한국석유공사 베트남 15-1광구 대규모 석유발견

2004년 한국석유공사 동해-1 가스전 생산개시

출처 : 우리나라 석유의역사
글쓴이 : 토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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