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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크랩] 秋史 金正喜(1786~1856)

 

추사체라는 글씨체로 우리에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김정희는 조선 말기, 부패한 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거의 10여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힘들고 기구한 일생을 마쳤지요. 하지만 김정희는 그가 그렸던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학문의 본질과 선비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는 김정희가 태어난 집안은 왕족의 후예로서, 본디부터 강직한 성품의 가문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그가 3세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으며, 6세 때는 입춘첩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나 봅니다. 24세 때는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참판까지 지내셨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여행을 하고, 조선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감동을 받은 그는 수많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 곳의 선진사상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그의 학문세계에 반영됩니다. 또한 실학사상의 선구자였던 박제가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조선의 문화와 학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김정희는 선진학문을 탐구하면서 추사파라는 학풍을 형성할 만큼 조선의 선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의 정신은 근거없는 지식과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지 말고, 사실적인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실험과 연구를 거쳐서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모든 사리사욕과 허영을 버리고, 정직하면서도 대상의 본질만을 압축시켜 표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추사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청나라 문인에게서 “해동제일의 문장” 이란 칭찬을 받았던 추사는 <서화불분론>이란 미술 이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시,서,화를 일치시키는 청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글씨는 그림처럼, 그림은 글씨처럼”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들었다면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우울해 했을 얘기지요.

 

김정희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암행어사와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가성을 거쳐 병초판서, 형조판서등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헌종6년, 1840년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제주도 유배길을 오르게 됩니다. 한참 그 세력이 하늘로 치솟던 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뼈 속으로 느끼며 추사는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바닷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히에 있는 모든 욕망을 바람에 날려보낸 것 같아요. 그 고독한 유배생활 중에 추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하였으며, 많은 제자도 길렀습니다.

 

특별히 그는 벗들과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참선과 차를 끓이는 일로 또 한 해를 보냈다”라는 글도 남겼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추사와 차를 마시던 친구들은 그에 대해 “폭우나 번개처럼 당당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온화했으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구요.

 

추사는 제주도에서 풀려난 뒤에도 몇 번의 유배생활을 더 겪은 후에 관악산 기숡에서 은거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영정처럼 하얀 수염과 고매한 문인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 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추사 죽림석실 칠언시 대련

 

珠林書妙三唐字 삼당의 글자는 글씨가오묘하여 구슬 숲을 이루고

石室文高兩漢風 석실의 문양은 품격이 높아 양한 (전.후한)의 풍이 있도다.

 

阮堂歲寒圖

 

주림석실의 시고 대련은 글자의 구성과 획의 운용에 있어 추사 행서의 표준이 될 만한 빼어난 작품이다. 당시 최고급 종이에 좋은 먹으로 정성들여 쓴 이 대련은 해서에 행서법이 곁들여진 단정한 서체로 조화가 잘 이루어져있다. 획은 굵기에 변화를 준 필획의 구사가 힘이 있으면서도 고졸하다.

국보 제180호.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23cm, 가로 61.2cm. 손창근 소장.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그림 끝에 작화(作畵)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跋文)과 청대(淸代) 16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제목과 '우선시상'(藕船是賞 : 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완당'이라는 관서(款書)를 쓰고, '정희'와 '완당'이라는 도인을 찍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마른 붓질의 필획만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재와 구도도 지극히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와는 반대되는 문인화의 특징으로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의 문기(文氣)와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

 
秋史 金正喜(1786∼1856)/ 죽로지실/ 조선 19세기/ 30.0×133.7cm

 


秋史 金正喜(1786∼1856)/五岳六經(행서)/조선 19세기

 


秋史 金正喜(1786∼1856)/호고유시好古有時/조선 19세기

 


秋史 金正喜(1786∼1856)/산숭해심 유천희해 (山崇海深 . 遊天戱海)/조선 19세기

 


秋史 金正喜(1786∼1856)/조선 19세기


秋史 金正喜(1786∼1856)/명월매화明月梅花(예서)/조선 19세기/好共梅華住一山 且呼明月成三友 阮堂作蜀隸法 桐人仁兄印定

 


秋史 金正喜(1786∼1856)/조선 19세기

출처 : 秋史 金正喜(1786~1856)
글쓴이 : 오리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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