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방명록)

[스크랩] 중국최고의 황제가 연개소문에게 바친 항복문서

료동성 해성역사소설 의용군연의(義勇軍演義)에 나오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에게항복문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부터 소개합니다.

"......却说唐王征东来到了城西南的一个小山头了望,高丽大兵十万人马一齐向这边掩杀过来. 唐王心里发慌,拨马就跑.高丽大将盖苏文举起长矛在后面紧追.唐王李世民所骑战马飞奔着, "呱达达......"一下,这马就停住了.你猜怎么着?原来前面是一条长长的、宽宽的、深深的、 泥泞巴唧的淤泥河.唐王这一看可傻了眼喽.难道大唐江山气数已尽?难道我大唐帝国就这么断送给你们? 难道我大唐的国君要向你们俯首称臣?想到这,面对高丽大将步步逼近的枪尖,他一抖马缰绳,喊了声"驾", 那匹战马四蹄扬空猛然一跃,怎么了?没过去.这河啊,太宽了.战马的四条腿全插进三尺多深的淤泥里. 战马使劲地往上抬腿想从泥坑里蹦出去,心想,这里哪是我驰骋之地?我得出来驮唐王上疆场杀敌呀? 可是这匹战马越陷越深.这可乐坏了盖苏文.只听盖苏文说:"唐王,你的大大的投降,我的大大的有赏. "唐王一听,我大唐江山疆域辽阔,物产丰饶,历代瑰宝在我皇宫里应有尽有,怎么还要你来赏我? 只是我今天察看地形,太无戒备之心,被尔追赶至此.待我冲出淤泥河,我要率百万唐兵,倾国之师, 无数儿郎杀你个片甲不留.正在唐王想着事儿的当儿,盖苏文把弓箭对准唐王,命手下扔过去纸笔, 命唐王写降书,说道不写降书就把唐王一箭射死.唐王面对降书掩面痛哭,心下一想,这回是彻底失败, 大唐江山是没个救了.忽然不远的山头上霹雳一声,有人大喊:"我主休慌,臣薛仁贵救驾来也!盖苏文 你哪里逃?"只见一员身穿白衣白甲手持长枪的白袍小将从山上骑马飞奔而来,说事迟,那时快, 三枪两枪杀退盖苏文的十万大兵,而那盖苏文早被白袍吓得魂飞魄散,逃出老远.薛仁贵救主心切, 用长枪往马肚子底下一穿,双膀一用力,唐王连人带马被挑了上岸.唐王大喜,封这员小将为游击将军, 后来加封安东都护,镇守辽东,至此无人敢犯.此是后话.方才讲的这段故事叫淤泥河救驾多亏薛礼.

위의 원문 출전 : http://www.ylch.net/lianzai/z003.htm

대략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당 태종의 동정(東征)시 이 곳(해성, 海城)의 서남쪽에 다다렀을 때 고려대장 연개소문은1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당태종을 잡으러 오고 있었다. 이세민이 당황하여 말고삐를 당겨달아나는데 연개소문이 긴창을 곧추 세우고 뒤에서 추격을 해왔다.

어느 순간 말이 멈춰서서보니 앞에는 길고 넓고 깊은 진흙뻘강인 어니하(淤泥河)이 있었는데 당태종은 우습게 생각하고설마 당나라가 운세가 다해 고구려에 물려주고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고구려 장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려는데 "이세민이다"라는함성과 함께 들리면 쫒아 오니 말의 네 다리가 세자도 넘는 진흙뻘강으로 빠져들어 빠져 나올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깊게 진흙수렁속으로 빠지게 되어 연개소문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연개소문 : 당나라 왕아 ! 네가 항복을 하면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노라.

당태종은 이 말을 듣고 " 당나라의 땅은 넓고 물자는 풍부하고 진귀한 보물은 황실에 가득가득한데 상은 무슨 상을 준단 말이냐? 내 비록 오늘 지형을 잘 살피고 준비를 못하고추격을 당해 이 곳까지 와 진흙구덩이에 빠졌지만 백만당병을 거느리고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연개소문은 활과 화살을 잡고 당태종을 조준하고 수하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명한 뒤 당왕에게 항복문서를 쓰라고 명령했다. 만약 항복문서를 쓰지않는다면 화살 한 방에 죽을 것이다. 당왕은 항복문서를 앞에 놓고 통곡을 하였다.

이 때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벽력과 같은 함성이 들리는데 " 왕께서는 마음 놓으시오,신(臣) 설인귀가 구하러 왔습니다. 연개소문 너 어디에 있느냐? " 라고 하여, 보니 흰 옷과 흰 갑옷을 입고 손에는 긴 창을 꼬나들고 젊은 장수가 산 위에서 말을 달려 나는 듯이 달려 와서 연개소문의 10만대군을 물리쳤다.

연개소문은 옷을 붙잡고 혼비백산하여 멀리 도망을 쳤다. 설인귀는 왕을 구하려고 장창으로 말의 배 밑을 푹 찔러 양 어깨로 힘을 써서 사람과 말을 강 위로 끌어 올렸다. 당왕은기뻐하며 젊은 장수에게 유격장군으로 삼고 훗날 안동도호부에 봉하고 요동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어니하(淤泥河)에서 왕을 구한 설인귀"라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상이 위 원문을 번역해 본 것이며 이 이야기는 근대에 일본이 요동을 침략했을 때 의용군으로 참전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경극에 나오는 이야기를 각색해서 고붕(高鵬)이라는 자가 병사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위의 의용군연의 또한 연극(경극)용 소설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한족 입장에서 쓴 이야기이며 실제 경극에 나오는 이야기도 위의 내용과 흡사합니다.

한족들이 아마도 이 것을 쓴 목적은 당태종은 위기의 순간에도 하늘이 돕는 황제이며 고구려를 물리친 설인귀의 무용담을 기리기 위해서 각색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위의 지명 어니하(淤泥河)는 실지로 있으며 어디인가에 대해서 찾아 보았는데,대륙 각 성 마다 어니하(淤泥河)라는 곳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바로 섬서성 서안 즉 장안 가까운 곳에 어니하가 있었고 산서성 대동(大同)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에서도 서안을 둘러 본 소감에서도 나오듯이 그 쪽 지역은 평시에는 흙먼지 날리는 메마른 땅이다가도 비가 오면 완전 갯벌처럼 푹푹 빠지는 진흙뻘밭이 된다는 이야기로 보면 우리의 전설속에 연개소문이 섬서성 장안(서안)을 점령하고 당태종에게 항복문서를 받고 다시는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고조 유방과 더불어 차이나 역대 최고의 황제라고 일컫는 당태종의 이야기가 나오는 경극에서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장면이 나올 수 있을까요?

또한, 차이나의 각 성의 당 태종의 전설에서 보면 연개소문에게 쫒기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또 쫒기고 살아나는 어떻게 보면 아주 도망만 다닌 군주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또한 강소성 염성의 몽롱탑 전설에서도 당 태종이 어니하에 빠져 우물 속에 숨고 산동성 즉묵시에서도 쫒기고 산동성 봉래에서는 도망치다 개울에 숨는 등 온통 어딘가에 숨고 진흙땅에 빠지고 도망다니는 그런 존재입니다.

덧붙여서 위의 이야기에서 설인귀가 흰 옷과 흰 갑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설인귀는 백호장군(白虎將軍)이며 연개소문은 청룡장군(靑龍將軍)으로 나옵니다.

청룡과 백호는 고구려의 사신도에서 보듯이 청룡은 동방의 상징이요, 백호는 서방을 상징하는 수호신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을 동쪽은 연개소문 즉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고, 서쪽은 설인귀 즉 당나라가 차지해 전체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여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형국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성립이 될 것입니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그 넓은 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어쩌면 고구려의 영토가 더 클 수도 있음) 사실을 고증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며 고구려가 일개 변강의 소수정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 [펌]몽롱탑(朦朧塔)의 전설 - 당태종이 우물에 숨은 사연 ▒

안녕하십니까?

강소성의 중동부 해안에 자리하고 있는 염성(鹽城)의 건호(建湖)현에 있는 몽롱탑(朦朧塔)의 전설에 대하여 소개를 할까 합니다.

http://homechina.co.kr/data/jiangsu/jiangsu.htm (강소성 지도)

몽롱탑(朦朧塔)

몽롱탑은 염성시 신장향 사양하와 서당하가 합쳐지는 곳에 있으며 탑은 3층으로 되어 있습니다.높이는 16.7 m 이고 팔각형 누각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탑 안에는 석함에 사리가 있다고 합니다.

1998년 30만위안(한화 약 4,500만원)에 이 탑을 복원하였는데 이 탑은 염성과 부녕 평원의 현존 하는 두 개의 탑 중에서 하나라고 합니다.

http://www.jh.js.cn/sxts/sxfc1.htm (몽롱탑)

이 몽롱탑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相?,唐太宗李世民率??征?,兵??城一?海?上。在一?月色朦?的夜?,李世民?人匹?夜巡大?,不??入了?近??的一片??,被?方巡?的主?盖?文??,立?策??刀追?,李世民急催??,落荒而走。可是?不?路,陷身于?泥河中。他只得跳下??,徒步逃命。?他?有一口枯井?,便跳入井中藏身。盖?文追到水井?,却不?人影,只看到那眼井口上?着一?完整的蜘蛛?,料定井里不?有人,便策?回?去了。后?李世民做了皇帝,?感激蜘蛛??的救命之恩,?派尉?恭在?口井?建了一座塔。 ?于李世民是“??天子”,又被蒙在井口的蜘蛛?掩?逃生,因此有了“朦?”一?,所以此塔取名?“朦??塔”。?在塔后建了一座?模?大的?慧寺。 ?在塔的?北方?有一?洗泥河,据??就是唐太宗?年?陷?泥河,??后洗?的地方

당태종 이세민이 군대를 거느리고 동정(東征)을 할 때에 염성일대에 병사를 주둔하였다.어느 달빛이 몽롱한(희미한) 늦은 밤, 이세민은 단기필마로 병영을 순찰하다가 적 진영을 염탐하기 위해 적 진영에 다가갈 즈음 조심을 안해 진흙탕뻘에 다달았다. 마침 적 진영을 순찰 중이던 연개소문 장군에게 발각이 되자 연개소문 장군은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쫓아왔다.

이세민은 황급히 말을 재촉하여 달아나는데 말이 길을 잘 못드는 바람에 그만 진흙탕뻘에 빠지게 되었다. 이세민은 말에서 뒤어 내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다가 문득 한 개의 마른 우물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우물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연개소문이 추격을 하다가 우물이 있는 곳에 도착을 하였을 때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물을 보니 우물 안에는 가지런한 거미줄이 걸려 있어 사람이 그 안에 있을 거라고는 헤아리지 않았다. 다시 말을 돌려 군영으로 돌아갔다.

후에 이세민이 왕이 되었을 때 거미줄이 목숨을 살려준 은공을 잊지 못해 감격하여 우물이 있던 곳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 어둡고 어려움(蒙)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줘 목슴을 건진데서 "몽롱(朦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이리하여 이 탑이 "몽롱보탑(朦朧寶塔)" 이라 불려졌다. 더불어 탑을 세운 후 비교적 큰 정혜사(淨慧寺)라는 절을 세웠다.

현재 이 탑의 동북방에는 세니하(洗泥河)가 있는데 당태종이 말과 함께 진흙탕뻘에 빠지고 위험을 벗어난 후 말을 씻었던 곳에서 유래한다.

중국 사람들은 이 탑을 보고 전설을 들으면서 당태종이 거미줄의 도움으로 천운이 있어 목숨을 건진 진룡천자(眞龍天子)라고 생각하겠지만,이 곳 염성지방에서도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염성전투의 결과는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나고 당태종이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줄행랑을 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렇듯 역사는 작은 단초 하나가 큰 역사의 줄기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출처 : 핵에너지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핵에너지 원글보기
메모 :